오늘은 6.25 전쟁 기념일이기 때문에 게임관련 포스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역사를 다루는 포스팅인 만큼 말투가 딱딱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부사관으로 군을 전역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 날엔 장난 같은 글은 쓰고 싶지 않네요. 그래서 최대한 노력하며 쓰겠습니다.

 요즘 세상은 솔직히 아직 전쟁 중이다. 어떤 곳은 내전이 일어나 전쟁 중이고 한국의 윗동네(북한)는 도발하며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적국에서 그런다한들 신경 쓸사람만 쓰지 막상 보통 일반인은 별로 신경안쓰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이 포스팅으로 조금이나마 전쟁의 무서움을과 선배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과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우리나라를 지원해 주었던 많은 나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6.25 전쟁이란?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범했다 하여 남침전쟁이다. 정확하게는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내려왔으니 기습남침전쟁이 맞기도 하다. 북한이 침략했으니 북침전쟁이 아니다! 가끔 말을 혼동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는 우리입장(우리주관 - 예 : 우리쪽에 침범했다!)에서 말을해야하므로 우리가 남쪽에 있으니 남이고 침략했기 때문에 침! 따라서 남침전쟁이다.(전 그렇게 생각하네요.) 

 한국전쟁(6.25 전쟁)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최초의 사상전쟁 이었고 이에따라 많은 자유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들이 참전을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쪽으로는 유엔군이 있었고 유엔군은 미국을 주로 63개국이 참전, 지원을 하였으며 북한쪽으로는  소련과 중국공산당, 몽골등이 지원을 했다.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휴전에 들어갔다. 따라서 한반도는 현재도 전쟁 중이다.

 

한국전쟁 전개

 전쟁전 -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으로 인해 북위 38도선을 군사 분개 선으로 설정을 하였다. 그렇게 나눠진 한반도는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기로 합의를 하였으며 처음에 38선은 단순한 군사 분계선이었지만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시간이 갈수록 군사분계선의 의미가 사라지고 한반도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려는 소련의 공작으로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었으며 그 때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38선은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 때 북한은 군사력을 증강하였으며 소련의 T-34 전차를 들여와 105 기갑대대를 창설하였고 무장된 4개의 보병사단도 편성이 되었다. 그 때까지가 소련군이 철수할 1948년 10월이었다.

  그 뒤로도 북한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 1949년 3월 18일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중공군에 있던 조선군 25000명을 인도 받아 북한군 10개 사단이 되었으며 13만명의 북한군 10개 사단이 38선에 배치가 되었다. 그 해 한국에서는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하였고 1949년 말에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한에대한 무력 침공계획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다. 또한 1950년 1월에 미국이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시킨다는 성명이 있었다.

 한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국군 병력과 장비가 북한의 군사력에 비해 너무나도 열세였었고 10만 병력의 8개 사단중에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당 게릴라를 소탕하고 있었다. 또 전쟁이 강행되기 바로전 6월 23일은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  국군 병력의 3분의1 이상이 외출을 쓰고 있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

전쟁 발생 1950년 6월25일~ - 새벽 4시 북한군이 전차부대를 앞세워 남침을 강행한다. 

 그 날 미국은 이 소식을 전달받아 유엔안보리를 즉시 소집하여 미국이 주관하에 군사제제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한반도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 또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했다.

 한편 한국은 무방비상태였기 때문에 북한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시각 국군 6사단은 북한군 2, 12사단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국군 6사단은 여러가지 열악한 전력 열세속에서도 3일동안 적군에게 큰피해를 주며 선전하여 한강방어선 구축과 연합군 증원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그 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였고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해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함락당하였고 그 때문에 정부는 대전으로 피신하였으며 동경에 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 들어와 전선을 시찰 후 미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미군과 유엔군 군사력 개입 시작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미군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북한군 제 4사단 예하부대, 제107전차연대 예하부대와 교전을 시작하였으며 적 전차 4대 격파, 적 42여명 사살, 85명 부상이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큰 인명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1950년 7월7일 유엔안보리에서 한반도의 유엔 군사활동을 위해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7월 14일에는 한국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고 국군과 미군은 그 때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지연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엄청난 공세에 침공을 허용하며 후퇴를 하게되고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게되었다. 정부도 부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국군과 미연합군은 최후의 보루 부산등을 지키기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8월15일 북한군은 대구에 침공하기위해 수십대의 전차와 많은 수에 병력을 집중하였으나. 미공군의 폭격으로 궤멸이 되었다. 이 사이에 유엔 연합군 병력이 증원되었고 북한군의 8월, 9월 공세를 국군과 유엔군의 합동 방어작전으로 북한군을 방어 격퇴하게 되었다. 이 때 전쟁의 흐름은 국군과 유엔의 반격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 유엔군 대반격 

 1950년 9월4일 ~ 1950년 9월15일 연합군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상륙지역 고립을 위한 공중폭격과 월미도 지역에 함정들을 이용해 함포사격을 실시했다.(참가세력은 함정 : 함정 8개국 261척,  미 해병1사단, 국군 해병연대/17연대 병력 75000명) 그 후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에 본격적인 인천상륙대작전(기습상륙돌격)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대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인천을 탈환하고 또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였으며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의 계기를 조성 해주었다. 그 뒤로 국군과 미 해병대는 서울을 탈환하기위해 동쪽으로 진군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북상하고있었던 유엔군과 오산지역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중부나 동부로 패주하였다. 1950년 9월26일 인천상륙작전 덕에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1950년 10월1일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10월15일~10월19일 평양탈환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의 8000여명의 부대를 격파하고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하였다.

 1950년 10월23일~10월26일에 걸쳐 서부진영의 국군 6사단은 초산전투를 개시했으며 초산을 점령 암록강에 진출 곧 통일이 눈앞에 있다는 감격에 겨워 암록강의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미 이때부터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1950년 11월3일~11월5일 제1차 청천강 전투 - 국군 6사단, 8사단 등, 유엔군 미 제1기갑사단 등 병력 45000명, 중공군 약 15만명 이 때부터 중공군과의 본격적인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중공군의 엄청난 병력으로 인해 수적 열세인  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의 부대를 급하게 전방으로 이동시키는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하였다. 

 

 1.4 후

 1950년 11월 24일 ~ 12월 4일 제2차 청천강 전투 - 제1차 청천강 전투에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든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6일 다시 전개된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세로 수적열세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많은 타격을 입고 청천강에서 후퇴하였다. 

 한편 1950년 11월 25일 동부진영의 미 제7사단은 북한군 42사단, 126사단의 패잔병들과 교전을 벌이면서 진격을 하였다. 영하30도의 혹한속이지만 진격을 멈추지않고 혜산진까지 진격하였으며 동해상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에 의해 파괴된 혜산진과 압록강 연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950년 11월 28일 중공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였으며 동부전선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7개 사단과 충돌하여 교전을 시작하였다. 이미 중공군 7개 사단은 포위망을 형성했기 때문에 장진호에서 빠져나가기란 쉽지않았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전황이 급변하자 미 10군단장은 북진계획을 재 검토 하였으며 함흥~흥남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은 2개의 연대별로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 포위망 돌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고립된 미 제7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기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58사단이 공격을 하고 중공군 60사단은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나 미 제 1해병사단의 활약으로 고토리로 집결시키는데 성공 12월 11일에 함흥지역에 진입하여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나면서 장진호 전투를 끝냈다.

 국군과 유엔군은 예상치 못한 공산진영의 강력한 반격에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한다.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공세 때문에 국군과 연합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미 8군은 임진강까지 후퇴해야만했다.

 1950년 12월 6일 국군이 철수하면서 공산군은 평양을 수복하였다.

 1950년 12월 9일 공산군은 계속 남진을 하였다. 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원산등의 지역에 폭격을 했지만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원산에서 철수를 하였다.

 1950년 12월 8일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졌기 때문에 흥남 철수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따라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으며 미 1 해병사단은 중공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이 작전에서 국군 1군단, 미 10군단의 병력 100,000명 피난민 약 100,000명 등과 군수품, 차량등을 안전하게 철수시켰다.

 하지만 1951년 1월 4일 군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에게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또 한 1월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고 1월 14일은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하였다. 

 

유엔군 재반격

지평리 전투 - 그 동안 후퇴를 했던 유엔군은 신방어선(평택-삼척)에서 전열을 정비 후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등으로(생략한 작전이 더 있다.) 진행된 반격 작전은 중공군의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아군의 진격 속도에 맞춰 천천히 진격하는 작전이었다.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군은 2월 11일 지평리에 4차 대규모 공세로 공격을 감행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한 국군, 미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해 후퇴했고 방어진지는 지평리의 견부진지로 남게 되었다. 중공군(39군 예하 3개 사단)이 지평리 진지를 공격하자 23연대 전투단(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가 주축 미군 37포병대대, 82방공포대, 503포병대대)은 2월 13일 중공군이 8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을 했으나, 미군이 모두 격퇴했다. 다음 날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2월 14일 중공군의 4개 사단 규모의 공격엔 방어선이 돌파되고 진지 내에서 백변전이 벌어졌으나, 끝내 연합군은 진지를 사수하였다.

서울 재탈환 - 중공군의 판단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3차례의 공세를 실시해서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 후 주저앉은 상태였다는 것, 또 한 보급에 차질이 생겨 공세를 지속적으로 할 수없다는 것, 수적으론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격파시킬 수 잇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군은 작전을 짜고 실행하여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 탈환하고 전선을 38선까지 북쪽으로 밀어올라갈 수 있었다.

가평 전투 - 1951년 4월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로 춘천의 국군 6사단 방어지역이 돌파되었다. 국군 6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 가평일대에 집결하였다.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등 연합군의 강력한 저항에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중공군 9병단이 중앙에 구멍을 내버렷던 것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위해 영연방 27여단이 동원되었다. 영연방 27여단은 영국군을 중심으로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군이 편제된 여단이었으며 국군 6사단을 구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했으며 국군을 추격하며 내려온 중공군 20군과 4월 23일 가평에서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영연방 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3개의 대대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고 본진인 영국군과 호주 왕실 3대대는 죽둔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다.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 후퇴하고 있는 국군 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 보급로를 확보하였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차단, 격멸시켰다. 영연방 27여단의 가평 전투 승리,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전투(3일간 방어)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백마고지 전투 : 1952년 9월 중순 국군 제 9보병사단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9사단 정면으로 중공군 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국군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 395고지에 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28보병연대를 예비부대로 하여 양 연대를 지원하게 했다. 또 유사시를 대비 51보병연대를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취약한 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10월 6일 중공군은 총 병력 약44000명과 55문의 각종포 지원을 받으며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래서 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1대대 군대로 돌격해 3차례의 중공군과의 전투를 치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0월 7일 중공군은 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개의 전초 기지를 포위하여 지속적인 보병돌격, 포격을 감행하여 395 고지를 함락시켯다. 하지만 28연대가 투입되어 395고지를 재탈환했다. 중공군은 또 다시 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5차 공세를 가해 395고지를 점령했지만 제 3대대가 반격하여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5차례의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도 피해가 심각했지만 국군도 만만치 않게 피해를 입어 29연대의 투입을 검토했다. 10월9일 중공군이 6차 공세를 감행해 30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후퇴하지만 29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하여 고지를 재탈환하였다. 10월10일 중공군 38군은 112보병사단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인해 전술을 펼치고 국군 9사단의 병사들도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쳣다. 하루동안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을 하였지만 고지를 장악한건 중공군이었다. 그렇지만 29연대 1대대가 2대대 병력을 증원 받아 탈환시키는데 성공 이후 4일 동안 뺏고 뺏기는 전투가 지속되어 10월 15일 28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 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29연대도 고지 북쪽 전초기지를 탈환하여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휴전 협정 - 1951년 6월 23일 유엔 소련대사 말리크가 휴전을 제의 하였다. 중공, 북한은 휴전 지지 의사를 밝혔고, 이승만 대통령은 거절하였지만 미국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으며 정전 협상이 체결될 때까지 각 군은 조금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계속 해나가고 있었다. 10월 25일 휴전회담장은 판문점으로 이동하였고 10월 28일 군사분계선 설정을 합의 보았다. 또한 12월 18일 국군, 유엔군과 공산군이 서로 포로명단을 교환하였으며 1953년 8월20일 부터 8월26일 부상병 포로교환이 이루어졌고 또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 그리고 7월 27일 한국을 제외한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남과북이 대치되어있다.

 

휴전 이 후

 휴전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도 북한의 도발을 끊임이 없다. 판문점 도끼만행, 강릉 무장공비, KAL기 폭파,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금강산 관광객 저격, 대청해전, 천안함, 연평도 포격, 핵실험등 너무나도 많은 도발을 감행하고 있으며 2015년 10월 전쟁준비가 끝난다고 연설을 하였다.

 

필자의 생각

 요즘 많은 분들이 6.25 한국전쟁에 대해 그렇게 잘알지 못합니다. 평화의 시대이다보니 막상 나라가 현재도 전쟁중인건 모르시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휴전이긴 하지만 아직 전쟁 중이고 적국인 북한은 매일매일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도발할 기회를 옅보고 있습니다. 또 한 무력도발만이 아닌 유언비어를 퍼트려 국민들의 국가 안보의 대한 인식도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안보의식에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많은 글을 찾아봤지만 자료가 너무 방대하였고 좀 더 쉽게 설명하기위해 그 자료들에 있는걸 약간씩 줄여나가면서 수정하려고 해봤습니다. 물론 반영할 글들은 반영하고요 하지만 그 만큼 상세하게 적지 않았기 때문에 빠진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기도 하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글은 저를 위한 것 뿐만이 아닌 국민들을 위한 글이라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많은 유언비어가 인터넷으로 난무하는 시대 저는 국가를 위해 이 글을 받칩니다.

글 솜씨가 좋지 않아 이글의 상당 수를 위키백과에서 참고, 참조하였습니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잊을 수 없는 6.25전쟁(APPZIL) 안드로이드 어플

한국 전쟁 상세 자료출처 링크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_%EC%A0%84%EC%9F%8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353&cid=46628&categoryId=46628

(앱)잊을 수 없는 6.25전쟁 : http://cafe.naver.com/appzil (홈페이지)

 http://nstore.naver.com/appstore/web/detail.nhn?productNo=838049&sr=ps  (앱 다운)

 

인천상륙작전 출처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C%B2%9C_%EC%83%81%EB%A5%99_%EC%9E%91%EC%A0%84

1.4 후퇴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1%C2%B74_%ED%9B%84%ED%87%B4

지평리 전투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D%8F%89%EB%A6%AC_%EC%A0%84%ED%88%AC

가평 전투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D%8F%89_%EC%A0%84%ED%88%AC

백마고지 전투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B%A7%88%EA%B3%A0%EC%A7%80_%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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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일리언웨어 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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